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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스탭이야기 #10_마라톤 하는 남자입니다_이용찬 팀장


마라톤

이용찬 관리지원팀장

“극기의 유혹”

이따금 찾아와 저를 유혹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성들은 여름마다 단발병이 돋는다고들 하는데, 저는 자신을 한계에 몰아넣고 스스로를 이겨보고 싶어하는, 극기병(?)이 생기곤 하지요. 승부욕도 없고, 귀찮은 건 끔찍이도 싫어하는 성격에, 집에서 홀로 책 보고 음악 듣고 영화 보는 것을 낙으로 사는 저에게 왜 이런 녀석이 찾아오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긴 합니다. 하지만 이미 돋아버린 병을 차마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VR(가상현실체험)로 고소공포체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겁쟁이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다보면, 결국엔 건강한 두 다리와 폐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마라톤을 해보기로 결정한 지 어언 3년째. 풀코스는 엄두가 안 나서, 하프코스(21km)에 올해 세 번째로 도전하게 됐습니다.

마라톤 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매일 운동을 절대 건너뛰지 않는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마라톤이란 것이 매일의 달리기가 습관이 된 이들만이 거머쥘 수 있는, 성실과 인내의 메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저에게 그런 성실한 습관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젊음을 무기로 삼아(32살.. 아직은 젊습니다!) 벼락치기 운동이라도 할 요령으로 마라톤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작년 마라톤 대회 때 신고 뛰다가 발톱이 다 나가버린 작아진 운동화 대신 새로운 운동화도 준비하고, 집 앞 성북천을 한 번 돌아보며 운동 계획도 세우기 시작했죠.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귀찮은 걸 세상 무엇보다 싫어하는 성격 탓에.. 오늘은 비가 와서 안 하고, 오늘은 업무가 빡셌으니 건너뛰고, 오늘은 뛸 기분이 아니어서 쉬고, 오늘은 내일 뛸 거니까 하루 쉬어주고(??).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새 대회 당일.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로 몸은 가볍지만 자신의 한계까지 다다르고자 하는 의지들이 무겁게 내려앉은 한강변 마라톤 스타트 라인 틈바구니에 서게 됐습니다.


(이 미소가 그 날 나의 마지막 미소였다는 것을 그 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달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출발선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저 앞에 ‘2시간 20분‘ 풍선을 달고 있는 페이스메이커 아저씨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프마라톤에서 2시간 20분 기록은, 쉬지 않고 천천히 계속 뛰면 나올 수 있는 기록 정도입니다. '기록이고 나발이고, 완주만 하자.' 매번 대회 때마다 속으로 되뇌던 이 주문을 입에 머금고 있었는데, 제 안에 슬며시 욕심이란 것이 생겨버리고 말았고(참고로 작년 기록은 엄청 걸었다가 뛰었다가 해서 2시간 50분쯤..), 결국 페이스메이커 아저씨와 말동무를 하며 함께 뛰게 되었습니다.

초반 페이스는 정말 좋았습니다. 페이스메이커 아저씨도 연신 페이스 조절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죠. 아직은 건재한 젊음의 활기에 스스로 무척이나 뿌듯해 했답니다. 문제는 10km 반환점을 돌고 나서부터였습니다.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죠. '그냥 여기서 멈출까? 아냐, 나약한 나를 이겨내야만 해!' 두 자아가 수만 번을 엎치락뒤치락하며 다다른 14km 급수대. 음료를 마시러 잠깐 멈추었던 몇 초 간, 저는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달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늘의 야식은 치킨이냐, 피자냐. 정답은 둘 다 시키면 된다. 끄덕끄덕)

“순간의 쉼표들이 주는 기쁨”

바하밥집에서 일을 하다보면 정신이 쏙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쁘게 사무를 보다보면 배식 나갈 시간이 되어 부랴부랴 배식 준비를 하고, 하필이면 다 처음 방문한 봉사자들 뿐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서 알려줘야 하고, 유독 그날 식사하러 온 손님들은 짜증을 내고, 설상가상 어마어마한 폭염에 온 몸은 땀에 젖어 어질어질한 그런 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 참아내야지, 하고 턱 밑까지 차오른 짜증을 꾹꾹 눌러 담고, 일단은 그 날의 업무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쳐 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를 꾸역꾸역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보면,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져있고, 살아남은 건 그렇게 지켜내려 했던 ‘가치’ 한 조각만 간신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죠.

차라리 하염없이 ‘가치’만을 쫓지 말고 그 순간순간 주어진 쉼표들을 발견하면 어땠을까, 하나씩 복기를 해봅니다. 바쁜 업무 중에도 건강한 일터가 있음에 감사하고, 봉사를 처음 왔음에도 성심성의껏 배식을 돕는 봉사자의 어여쁜 마음에 뿌듯해하고, 한 끼 식사에 대한 손님들의 진심어린 감사 인사와 미소에 덩달아 미소 짓고, 뜨거운 햇빛 아래 냉수 한 잔이 선사하는 시원함을 몸 속 깊이 누렸더라면. 이 아쉬운 복기 속에 잠이 드는 날들은 어쩐지 잠도 설치게 됩니다.


(가만 보면 쉼표 투성인 애증의 바하밥집 배식 현장)

“나와 함께 걷기”

14km 급수대. 물 한 컵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기지개를 펴보고, 크게 숨을 한 번 내쉽니다. 후우. 결국 저는 그 곳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기로 하고,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함께 뛰던 페이스메이커 아저씨가 조금만 더 힘을 내보라고 격려 해주시기도 했지만,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해맑게 웃으며 아저씨를 보내드렸죠. 하프마라톤의 도전은 아직 7km를 남겨둔 14km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쉬지 않고 달리느라 무거워진 몸에 집중됐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다른 것들에도 여유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은 한강의 물결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바람은 땀을 식혀주기에 더없이 시원했죠. 급수대마다 주는 게토레이와 초코파이는 왜 그렇게 맛있는지. 산책 나온 사람들의 여유 있는 미소들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걷다보니 2시간 40여분 끝에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프마라톤을 시작할 때의 목표였던 나 자신을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2시간 20분의 기록으로 끝끝내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냈을 때의 쾌감은 어땠을까요. 그건 경험해보지 못해 모르겠지만 대신 '나 자신과 함께' 남은 마라톤 코스를 마음에 새기며 느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목표'에 취해 나 스스로를 잊기보단 지금 이 순간 주어지는 내 감각을 존중했을 때 얻는 기쁨말이죠. 비겁한 변명일까요? 하하.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치열한 싸움 끝의 영광보단 조용히 스며드는 이 기쁨이 더 좋습니다. 어떻든 골인만 하면 되니까요.

여기까지 글을 쓰다 보니 싱잉앤츠 밴드의 ‘우주의 먼지’ 한 소절이 떠오르네요.


“분주한 세상에서 조용히 재밌게 살고 싶어.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 들어보세요

이 글을 올려주실 기남 실장님이 BGM으로 깔아주실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저에게 주어진 쉼표를 누리며 맛있는 것 많이 먹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그리고 내일(토요일) 배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땐, 그 쉼표들이 건네는 기쁨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푸욱 잠에 빠져야 겠습니다.


(2시간 40여분의 영광의 메달. 이제 3개 모았으니 4개만 더 모으면 용이 나타나 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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